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3개 식민지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[[잉글랜드 왕국]]은 [[1607년]]에 [[버지니아주]]에서부터 시작하여, [[1732년]] [[조지아주]]에 이르는 13개의 [[식민지]]를 형성하였다. 이들 식민지는 [[프랑스]]의 아메리카 식민지와 달리, 자영농으로 구성된 [[가족]] [[단위]]의 정착민이었다. 때문에 [[인구]]도 많고 농지 또한 넓었다. 필연적으로 [[땅]]을 지키려는 [[아메리카 원주민]]들과 충돌이 잦았고 [[영국 국왕]]은 이에 따라, 자체적인 무장과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였다. 13개 식민지의 인구는 [[1625년]]에 1,980명이었으나 독립전야의 [[1775년]]에는 240만명으로 크게 불어나게 된다. [[1775년]] 당시 [[그레이트 브리튼]]의 인구수는 약 700만이었다. [[잉글랜드]]에서 550만, [[웨일스]]가 50만이었으며 [[스코틀랜드]]가 125만명이었다. 즉 당시 "13개 식민지"는 잉글랜드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. 인구의 구성은 85%가 그레이트 브리튼 출신이었고 9%가 [[독일]], 4%가 [[네덜란드]] 출신이었다. 이들은 대다수 [[농민]]이었고, 나머지는 [[상업]](주로 [[밀수]]) 종사자들이었다. 영국의 아메리카 통치는 상당 부분 유화적인 것이라서 13개 식민지는 나름대로 만족하고 살았다. 실제로 이들은 [[미국 독립선언서|미국 독립선언]]이 이루어지기 일보 직전까지도 영국왕 [[조지 3세]]에게 싹싹 빌어서 용서를 구하자고 주장하는 주화파가 많았다. 본격적으로 [[영국 정부]]와 13개 식민지 정부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, 프렌치-인디언 전쟁([[7년 전쟁]])이다. 영국은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놀라운 전과를 얻는다. 13개 식민지인들은 충성스러운 영국 왕의 [[신민]]으로 전쟁에 임하여 [[승리]]를 거두었다고 자축하고 좋아하고 있었으나, 오히려 영국 정부는 1763년에 13개 식민지인들이 [[애팔래치아 산맥]]을 넘어 개척하는 것을 금지하였다. 이는 오랜 전쟁으로 군비가 바닥난 상태에서 식민지인들이 [[서부]] 개척을 시도하면 [[아메리카 원주민]]들과 충돌로 또 군비가 지출되어 [[재정]]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. 게다가 이 선언으로 13개 식민지인들은 불만이 상당히 많은 상태에서, 오랜 [[전쟁]]으로 [[재정]] 지출이 컸던 영국 정부가 이를 식민지들에게 과도한 [[세금]]을 물려 처리하려고 했다.[* 7년 전쟁 직후 영국 정부의 부채는 1억 3,000만 파운드에 달했다. 이는 당시 영국 세수 총액의 약 절반이나 해당한다.] 대표적으로 [[1764년]]과 [[1765년]] 설탕세와 인지세를 식민지인들에게 부과하는데, 13개 식민지 내에서 이에 반발하여 대규모 [[폭력]] 사태가 발생하여 [[1766년]] 이를 철회하기도 했다.[* 13개 식민지인들은 영국 정부의 곤궁함을 이해하여 세금 부과에 대해서 이해하기도 했다. 허나 이번 기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늘리고자, 식민지 의회가 [[영국 의회]]에서 대표성을 갖기를 희망했다. "대표없이 과세없다."란 주장이 여기에서 비롯한다.] 하지만 영국 정부는 이에 멈추지 않고 [[1767년]] 타운젠드 법을 통과시켰다. 이 법은 [[납]], [[종이]], [[페인트]], [[유리]], [[홍차]] 등과 같은 일상 용품 수입에 대해 '''[[관세]]를 정한''' 법이었다. 식민지 지역은 해당 품목들을 영국 본토에 팔아넘기며 [[돈]]을 꽤 짭짤하게 벌었었는데 관세가 매겨지자, 매출이 급감하게 되어 결국에는 [[분노]]를 터뜨리고 만다. 사실 영국과 13개 식민지 사이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13개 식민지에 대한 [[개념]]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. 당시 영국은 13개 식민지가 [[본토]]와 별개라고 생각하였다. 따라서 13개 식민지인들이 [[영국 의회]]에 진출하는 것에 반대하였으며, [[프렌치-인디언 전쟁]]의 비용은 전쟁의 직접적 당사자인 13개 식민지가 부담하기를 원했으며, 식민지인들이 [[애팔래치아 산맥]] 너머로 개척하는데 영국 본토 [[군인]]들이 투입되는 것을 꺼렸으며, 영국과 13개 식민지 사이의 [[거래]]에 관세를 매기려고 했다. 반면에, 식민지인들은 반대로 생각하였다. 13개 식민지인들도 [[영국인]]이니 [[영국 의회]]에 진출해야 된다고 생각하였고, [[프렌치-인디언 전쟁]]의 비용은 (식민지 주민을 포함한) [[영국인]] 모두가 공평하게 부담하여야 된다고 생각하였으며, [[애팔래치아 산맥]] 서부 개척은 영국의 [[국력]]을 높여주고 영국의 [[이름]]으로 이루어지므로 영국 [[군대]]가 투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. 이 때문에 식민지인들은 영국과 13개 식민지는 하나의 나라이므로 둘 사이 거래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였다. 물론 이런 [[여론]]의 뒤에는 관세를 물기 싫었던 13개 식민지 수출업자들의 [[선동]]도 한몫 했다. 하지만 [[토마스 페인]]이 "[[상식]]"이라는 소책자를 발매하면서 여론은 완전히 뒤바뀌어버리고, 13개 식민지인들은 스스로가 영국인과 구별된다는 의식을 갖게 되며 [[독립]]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. 폭발은 [[보스턴]]에서 시작되었다. 보스턴은 영국이 [[세관]]을 설치하여, 집중 대상으로 돈을 뜯어내던 [[지역]]이었기 때문에 그 불만이란 상상초월이었다. 이상징후를 느낀 세관은 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, 영국 정부는 군을 파견한다. [[1768년]] [[10월 1일]] 영국 군대는 보스턴에 상륙하였고, 세관 업무는 정상으로 돌아간다. 그러던 와중, [[1770년]] [[2월 22일]],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[[미성년자]]가 세관 [[직원]]에 의해 살해되는 [[사건]]이 발생되고, 이에 대규모 봉기가 격발되어 동년 [[3월 5일]] [[보스턴 학살 사건]]이 발생되어 5명의 식민지 [[시민]]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. 식민지에서 [[상황]]이 만만치 않게 돌아가자, [[영국 의회]]는 무언가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종합되었다. 결국, [[1770년]] [[4월 12일]] 타운젠드 법은 철폐되나 [[홍차]]에 대한 항목은 제외되었다. 이 때문에 눈 가리고 아웅한다는 여론이 많았고 단단히 빡친 보스턴 [[주민]]들은 [[보스턴 차 사건|1773년 12월 16일 밤에 홍차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즐거운 축제]]를 일으켰다. 영국인들은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는지, 보스턴 항구 [[봉쇄]]라는 조치로 맞섰다. 뒤이어 [[메사추세츠 주]] 자체를 폐지하려고 준비하였고 이를 알게된 식민지인들은 크게 반발하였다. 서로의 대립각이 날로 높아지는 와중에, 13개 식민지들은 일단 모여서 회의를 해보자는 생각에 [[1774년]] 대륙회의를 소집하였으나 진척은 없었다. 편의상 13개 식민지라고 하지만 북아메리카의 각각 독자적인 여러 식민지들 중에서 훗날 [[미합중국]]에 가담한 식민지들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일 뿐이고 사실 식민지마다 [[총독]]이 따로 [[파견]]되고 각자 독자적인 [[의회]]와 [[정부]]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식민지들은 딱히 동질적인 소속감 같은 것은 없어서 정착민들은 스스로를 '필라델피아인', '매사추세츠인' 등으로 여겼다. 대륙회의가 소집될 때도 [[사우스캐롤라이나주]]나 [[뉴욕주]]는 매우 소극적인 자세[* HBO의 대하사극 <존 애덤스>에서 이것이 잘 고증되었다.]를 보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